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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이제 고생길이 열렸어.

결혼과 출산을 앞둔 이들에게 넌 이제 좆됐어라고 말하지 말자. 해서는 안 될 말이다.
넌 이제 고생길이 열렸어.

우선 글의 제목으로 쓰는 거라서 조금 순화된 표현으로 썼다. 정확한 표현은 이랬다.

넌 이제 좆됐어.

내가 언제 많이 들었을까 생각해봤더니 두 가지 상황이 떠올랐다. 하나는 결혼이 임박했을 때였고, 또 다른 하나는 아이가 태어날 무렵이었다. 주로 내 주변의 친구/지인 중 남성들에게서 많이 들었다.

좆됐다는 표현은 흔히 망했다는 뜻으로 쓰이는데, 결혼과 출산을 앞두었던 나에게 저 표현을 쓴다는 것은 나에게 아래와 같이 말한 것이다.

넌 이제 망했어. 결혼과 아이 때문에 너의 행복한 시절은 끝났어...

뭐 대충 이런 뜻이다.

곰곰히 생각해보건대, 왜 저런 표현을 행복한 일을 앞둔 나에게 아무렇지 않게 쓰는지 당시에도, 지금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친구에게 할 소리인가? 저 말에 대한 내 반응은 날 아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짐작할 것이다.

그 의미를 짐작해보자면, 저 말을 하는 이들은 남성의 삶에 있어 자유가 매우 중요한데, 결혼과 육아가 자유를 제어하는 하나의 족쇄로 본다는 것이다. 결혼했으니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고, 아이가 태어났으니 아이 때문에 너가 하고 싶은 것 못하게 된다. 그러니 너에게 고생길이 열렸다.

다른 의미로는 좋게 생각해서 나도 이미 겪어봤는데 쉽지 않아. 너도 이제 겪어보면 알꺼야. 뭐 이런 심리이기도 하다.


각자들의 세상에서..

신기하게도 내 주변의 여성들, 특히 엄마들 사이에서 같은 표현을 쓰는 것을 보지 못했다. 듣지도 못했다. 보통 이런 표현이 많다.

혹시 필요한 거 있어요?

가장 먼저 나오는 질문이다. 상대방에게 어떤식으로든 도움을 주려하거나, 아니면 격려/응원이 이어진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주로 남성들 사이에서, 특히 술자리에서 이런 표현을 너무나도 쉽게 쓴다.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다. 실제 내가 들은 것이기도 하다.

이 형님이 겪어봐서 아는데... 넌 이제 좆됐어.

당시 이 말을 들은 나는 친구에게 엄청 화를 냈고, 더 이상 그 친구를 보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도 부글부글 속이 끓는다. 확 뒤집어 엎었어야 하는데라는 진한 아쉬움이 있다.

왜 저런 표현을 쓸까 생각해봤는데 생색내고 싶기 때문인거 같다. 무슨 생색이냐고? 집에서 힘들고 고된 일들을 엄마라는 역할을 수행하는 엄마들이 거의 다 하는데, 아빠라는 역할을 수행하는 남성들은 그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그들의 동지가 될 예비 신랑, 예비 아빠들에게 생색을 내는 것이다.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라며 선배인거 마냥 잘난체 하고 싶어서다.

물론 정말 힘들수도 있다. 그런데 본인의 아내보다 힘들었을까? 분명 아닐 것이다. 굳이 술자리에서 말하는 이유가 뭘까?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어도 술자리에서의 실수로 그냥 퉁칠수 있기 때문이다. 짜증나는 이야기가 오고가도 술마시다 보면 그럴 수 있지라는 식으로 넘어가니까 말이다. 맨정신에 말할 용기가 없으니 술의 힘을 빌려 하는 행동들인데 얼마나 유치한가..


미디어에서는...

우연히 아래 기사로 접하게 되어, 이혼한 남성 연예인들이 출연하는 '돌싱포맨'이라는 프로그램과 이혼한 여성 연예인들이 출연하는 '내가 키운다'라는 프로그램들을 봤다. 기사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돌싱포맨에서는 오롯이 남성 연예인 그들의 이야기만을 한다. 무게 중심이 남성들에게 있다. 반면 내가 키운다에서는 주인공은 여성 연예인이지만 무게 중심의 많은 부분을 그녀들의 아이에 두고 있다.

[김은영의 영상 뽀개기] 싱글맘과 돌싱맨... 너무 다른 이혼 이후의 삶
올해의 헤어스타일, 패션스타일 심지어 올해의 색까지 있을 정도로 우리는 유행 속에 살아간다. 방송가에도 유행이 있다. 얼마 전까지 트롯 오디션 열풍이 불면서 모든 방송사들은 컨셉이나 출연진을 살짝 바꿔 저마다 트롯 오디션 프로그램 유행에 동참했었다. 때로는 인물들이 유행의 중심에 서기도 한다. 화제의 인물들은 다양한 방송사와 프로그램에 집중적으로 출연한다. 한마디로 ‘물 들어올 때 노 젓기’를 보여주는 방송가의 양상들이다. 이는 시류에 동참하지 못했을 때 트렌드에 떨어진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함도 있지만, 어쩌면 화제가 되는 인물이나

두 프로그램의 의도는 다르지만, 시기가 묘하게 겹쳐 미디어가 바라보는 남성의 삶과 여성의 삶을 여실히 보여준다. 남성에게 이혼은 곧 다시 찾은 '자유'를 의미한다. 되찾은 싱글로써의 삶을 보여준다. 여성에게는 이혼했더라도 넌 엄마야.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싱글이지만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엄마야라고 말한다. 과거의 미디어에 비하면 그나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그래도 어떻게 하면 조금 바뀔까?

좆됐어라는 말을 들으면 화를 내고 민감하게 반응하는게 좋은 방법이다.(그냥 엎어버리자.) 아니면 정색하는 것도 방법이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결혼이나 아이의 출산과 같은 행복한 일을 앞두고 남에게서 넌 망했어라는 등의 비관적인 소리를 들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나중에 결혼생활에서 너가 편하려면 지금부터 상대를 휘어잡아야해라고 지랄같은 조언(?)을 하는 놈도 있다. 그냥 무시가 답이다. 그런데 그런 조언을 듣는 놈들이 있다. 조언한 놈과 한 집에 사는게 아니라 네 배우자와 한 집에 사는거다. 쓰잘데 없는 조언한 놈들의 마음은 이렇다.

난 불행했었으니까(불행하니까) 너도 불행해야해.

개같은 소리를 하면 그냥 그 자리에서 불같이 화내고 그 이후로 안 보면 된다. 손절하는게 건강에 이롭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들은 계속 비슷한 이야기를 당신에게 할 것이다. 내가 뭐랬어. 그냥 좆된거라니까.. 본인이 그래왔기 때문에, 그리고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게 최고의 되갚음은 그들이 하지 못했던 것을 해내면 된다. 배우자를 열심히 돕고 아이 육아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얻어지는 행복을 보여주면 된다. 그게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