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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 너머, 뒤바뀐 다수와 소수

포켓몬을 잡으러 갔다가 만난 한 아이와의 대화에서 지하철역 하나를 사이에 둔 두 세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러시아어와 한국어가 공존하는 이 작은 동네의 모습은 우리의 미래를 살짝 엿보게 하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지하철역 너머, 뒤바뀐 다수와 소수
해당 초등학교에는 한국어와 러시아어가 함께 쓰인다.

포켓몬스터를 좋아하는 아들의 요청으로, 여느 부모들처럼 포켓몬을 잡으러 다닌 적이 있다. 올해 2월 어느 날, 집 근처 체육관에서 '러브로스'라는 전설 포켓몬 레이드 배틀이 열렸다. 현장 참여로만 잡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체육관으로 갔다. 다른 참가자들 덕분에 포켓몬을 잡을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한 아이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도 포켓몬 잡으러 오셨어요?
응, 아저씨 아들이 잡아달라고 해서 왔지. 너는 잡았니? 아까 친구들이랑 열심히 하던데.

아쉽게도 아이는 포켓몬을 놓쳤다고 했다. 그 아이는 한국어와 러시아어를 쓰는 초등학생이었다.

아이의 이름은 디마(가명)였다. 디마는 자신이 게임에서 잡은 포켓몬들을 나에게 자랑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마침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아이스크림을 사주며 디마와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포켓몬 자랑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디마는 나에게 여러 가지를 알려주었다. 그의 부모님은 오래전에 한국으로 이민 왔다고 했다. 디마는 한국에서 태어났으며, 형과 누나가 있다고 했다. 그러고는 나에게 "아저씨는 어디에 살아요?"라고 물었다. 나는 저기 보이는 지하철역 건너편에 산다고 알려주었다.


지하철역 너머

디마는 지하철역 건너편에 사는 친구가 없다고 말했다. 내게는 좀 신기하게 들렸다.

대화 중 디마는 갑자기 누군가를 보고 외쳤다. 디마가 부르자 한 어른이 냉큼 달려왔다. 알고 보니 디마가 다니는 학교의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아이가 낯선 어른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놀라서 뛰어온 것이었다. 그 자리를 피하면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킬까 봐 선생님에게 아이를 만나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선생님이 근무하는 초등학교는 내가 있던 공원 옆에 위치한 학교였다.

나는 선생님에게 디마가 지하철역 건너편에 친구가 없다고 말한 것이 신기하다고 물었다.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굳이 건너갈 필요가 없어요. 친구들이 다 여기에 있으니까요. 디마는 한국어를 사용하지만, 다른 아이들 중에는 한국어를 못하는 친구들도 많아요. 그래서 저도 그 아이들과 더 잘 소통하기 위해 러시아어를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이 지역은 최근 몇 년 사이 극적으로 변했다.

지하철역을 기준으로 북쪽과 남쪽으로 나뉜다. 나는 남쪽 지역에 산다. 디마는 북쪽 지역에 거주한다. 북쪽 지역에는 2개의 초등학교가 있으며, 지하철역으로부터 약 1.5km 반경 내에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에서 온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이 이민자들 중에는 우리가 '고려인'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포함되어 있다.

불과 3,4년전만해도 러시아어를 쓰는 아이들은 평균적으로 각 학급에서 20~30% 정도였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입학생 중 한국어를 쓰는 아이들의 비중은 줄어든 반면, 상대적으로 러시아어를 쓰는 아이들의 비중은 늘었다. 현재는 각 학급당 60% 정도의 아이들이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처음에는 한국어를 쓰는 아이들의 부모들이 다문화 경험을 긍정적으로 여겼다. 이때는 한국어를 쓰는 아이들이 다수였다. 하지만 지금은 자녀들이 따돌림 당할까 걱정하여 다른 학교로의 전학을 요청한다. 아이들끼리 언어가 통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아이가 소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부모라면 당연한 걱정이다.

러시아어를 쓰는 아이들은 일상에서 한국어를 접할 기회가 적다. 가정에서도, 친구들과도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학교가 유일한 한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였지만, 이마저도 러시아어를 쓰는 아이들의 증가로 줄어들고 있다. 오히려 선생님들이 학생들과 소통하기 위해 러시아어를 배우는 실정이다.

아이들이 언어를 빨리 배우는 방법은 함께 놀면서 배우는 것이다. 어른들이 언어교환 모임에 나가는 것과 비슷하다. 아이들에게는 방과 후 시간이 좋은 기회다. 그러나 이 지역의 방과 후 모습은 다르다.

한국어를 쓰는 아이들은 주로 태권도 학원에서 시간을 보낸다. 한국 사회의 여느 아이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반면 러시아어를 쓰는 아이들은 동네 형들과 함께 공원의 농구장, 축구장에서 운동을 한다. 이 공간들을 지나다 보면 러시아어밖에 들리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두 그룹의 아이들이 방과 후에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경우는 드물다.


지하철역을 건너지 않은 아이들

디마와 비슷한 또래 아이들에게 지하철역은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닌, 두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과 같은 존재이다. 지하철역 너머로 가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지하철역 너머, 남쪽에는 그를 기다리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디마의 모든 일상, 학교, 친구들, 놀이터는 모두 지하철역 북쪽에 있다. 러시아어만으로도 아이의 세계는 완벽하게 돌아간다. 한국어를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어를 쓰는 아이들도 비슷한 상황이다.


글을 통해 언급한 상황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사회적, 경제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자연스럽게 형성된 결과다. 두 세계의 아이들은 결국 같은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들이다.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아이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환경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언어와 문화의 경계를 넘어 아이들이 서로에게 친구가 될 수 있도록, 어른들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지금은 특정 지역에 국한된 이야기지만, 이는 우리 사회의 뒤바뀔 모습을 예고하는 신호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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